핑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10년 간격을 두고 두 번 읽은 후 회사 도서관에서 빌려 읽게 된 박민규 작가의 또 하나의 소설 『핑퐁』. 이 작품을 읽으면서 박민규 작가가 주로 고민하는 주제는 마이너리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류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 마이너리티의 삶을 다루면서도 밝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은 대체로 어둡다.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문체가 재미를 주는 것은 여전하지만 희망보다는 체념을 느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수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의 간극. 수십억 인구 중에서 한 명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 어쩌면 철학적인 질문을 남기는 작품이라 읽고 난 후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다만 내 삶의 여러 측면 중 주류를 벗어난 부분에 대해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다들 그렇게 존재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주류의 결정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볍게 읽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고민을 남긴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기도를 멈춘 것은 가족과 함께 말레이시아를 다녀와서였다. 비행기를 타고, 난생처음 구름 이상의 세계로 올라간 것이었다. 보이지 않겠구나.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육십억과, 오만구천이백사명과, 천구백삼십사명과, 육백삼십육명과, 마흔한명에 둘러싸인 중학생 같은 게 보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아니 실은 육십억의 인류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26쪽)

자신의 라켓을 가진다는 건 말이다, 말하자면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가진 것이란 얘기야. (46쪽)

소외가 아니고 배제야. 벌판을 향해 걸어가며 나는 중얼거렸다. 뭐가? 모아이가 물었다. 따를 당한다는 것 말이야… 소외가 아니라 배제되는 거라고. 아이들한테? 아니, 인류로부터. 살아간다는 건, 실은 인류로부터 계속 배제되어가는 거야. 깎여나가는 피부와도 같은 것이지. 그게 무서워 다들 인류에게 잘 보이려 하는 거야. 다수인 척, 인류의 피부를 파고들어가는 거지. (58~59쪽)

아무튼 얘야. 혜성 같은 건 오지 않는단다. 그냥 계속… 이렇게 사는 거란다. 알겠니? (94쪽)

야, 못… 그러니까 따를 당하는 거야 이 바보야, 널 처음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아냐? 아, 아니. 말하자면 저건… 무슨 이미테이션이 아닌가, 그런 느낌이었어. 이미테이션? 그러니까 진짜 너는 어딘가 다른 곳에 살고, 눈앞의 이건 짝퉁이다… 뭐 그런 느낌이지. (102쪽)

적응이 안돼요. 다들 결국엔 자기 할 말만 하는 거잖아요. 얘길 들어보면 누구도 틀렸다고 할 수 없어요. 왜 그럴까요, 왜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틀린 곳으로 가는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의 책임일까요. 무엇보다 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 (117쪽)

이윽고 세끄라탱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는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117~118쪽)

즉 너와 나 같은 인간들은 그냥 빈 공간이란 얘기지. 그렇지 않을까? 즉 보이지 않는 거야. 멀리서 보면 그저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간… 그럼에도 우린 이렇게 존재해. 그럼 우린 뭘까? (171쪽)

너와 나는 세계가 < 깜박>한 인간들이야. (219쪽)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이 작가에게 미안할 정도로 좋았고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소설이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지만, 어떤 면에서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세상이 시키는대로 그냥 살지 말고, 다시 생각해보자는 거다. 열심히 잘 하는 것만이 미덕인 사회, 아름다운 것만이 미덕인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행복한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은 대부분 자기와, 자신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왜 인간은 그냥 살아갈 수 없는 걸까. 그냥… 스스로의 삶을 살지 않고, 자신보다 못한 타인의 약점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것인가…

그를 떠나며 그녀가 남긴 편지(262~289)에는 그녀가 자라오며 겪었던 상처와, 그녀의 손을 잡아준 그에 대한 고마움과, 그에 대한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어 떠나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무료, 해도…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고 나는 믿었다. 무료하므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 무료해서 쇼핑을 하고, 하고, 또 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생활을 했다는 생각이다. 좋은 소설은 생각하게 한다. 사람을 깊이 이해하게 한다. 세상을 넓게 보게 한다. 나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좋은 소설을 많이 읽어야겠다.

끝으로 작가의 말을 남긴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대학원생이었던 11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재밌다는 것이 나의 주된 감상이었다.

10년차 직장인인 지금의 내가 다시 읽었을 때 이 책은 완전히 다른 책이었다. 재미보다는 고민과 위로를 안겨주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아무런 의심없이 세상이 시키는대로 필요 이상으로 바쁘게 살고 있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스스로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을 타인에게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아내와 나는 평일에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다. 가끔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필요 이상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면서 필요 이상의 돈을 버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인생의 모든 날이 휴일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쉬고 싶을 때 쉬어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삼미 슈퍼스타즈 덕분에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