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도입부가 잘 안 읽힌다는 심사평처럼 처음엔 다소 지루했다. 책은 덮어두고 영화를 볼까 하는 유혹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꼭대기에 다다르기만 하면 나머지 길은 활강장이 된다는 심사평처럼 끝으로 달려갈 수록 가슴은 뜨거워졌다.

일주일의 폐쇄병동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작가에게 환자들이 남긴 말은 ‘우리 한을 풀어달라’였고, 이 책은 작가의 대답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명,
승민, 만식씨, 김용, 십운산 선생, 거리의 약사, 경보 선수, 한이, 지은이, 우울한 수험생을 통해 그들의 삶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나는 또 한 번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잘 놀고 있다가 별안간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존재의 징표’에 대해 물은 거라면, 내놓을 것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유령이었다. (p240)

승민의 모습은 희미해졌다가 땅거미 속으로 빨려들었다. 헤드랜턴의 빛만 두어 번 깜박거렸다. 이윽고 그마저 사라져버렸다. 언덕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싸늘한 바람이 밤을 몰아왔다. 몸이 떨려왔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떨림이었다. 목과 가슴 사이에선 불처럼 뜨거운 것이 오르내렸다. 그 뜨거운 한기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날아간 자에 대한 ‘경외’, 갈 곳이 없는 자의 ‘절망’. (p328)

온전히 나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무난히 잘 살아가고 있지만 진짜 너의 인생을 살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최근 고민은 나에게 지워진 부담을 가볍게 하는 데에만 있었지, 내가 주체가 되어 내가 짊어질 부담을 스스로 선택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눈 앞에 닥친 현실을 처리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데에 인색했다. 내소사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종의 기원

『7년의 밤』을 읽은 후 정유정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중간 쯤 읽었을 때 제목이 왜 『종의 기원』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종의 기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무엇이 악인을 탄생시켰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고, 그 사실이 나를 두렵게 했다. 책의 주인공 유진이 악인이 된 원인이 오로지 자라온 환경에 있기를 바랬지만, 유전적인 영향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 말미 작가의 말에서 소개된 프로이트의에게서 악의 기원에 대한 미약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엉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달려 있다.”

누구나 어느정도 악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느냐 마느냐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에 달려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사회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교육, 학교의 교육의 첫 번째 목표는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이코패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인의 감정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채 날이 서린 말들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7년의 밤

재밌게 읽었다.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책을 펼쳐보는 편인데 이 책은 달랐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범죄자라도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판단해선 안 되겠다는 것, 비록 소설이지만 사람이 살아온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부모의 사랑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는 것. 작품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최현수를 바라보면서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를 떠올렸다.

소설 속에 소설을 담은 구성,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연달아 서술한 방식은 흥미로웠다.

책 앞 부분에 세령마을 지도가 있다는 걸 뒤 늦게 알게 된 점은 많이 아쉬웠다. 읽으면서 상상해 내기엔 집중력과 상상력이 부족했으므로.

최현수의 상황에 내가 놓였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자녀를 가져보기 전에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