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07 조은·이기훈 원화전

하계 휴가 다섯째 날에는 우연히 발견한 미술 전시회에 다녀왔다. 장소는 구의역 3번 출구 NC이스트폴 2층에 위치한 그라운드시소 이스트. 이번에도 전철로 이동하는 길에 두 작가에 대해 예습을 했다.

  • 조은: 한지와 먹을 중심으로 아크릴 등 다양한 재료를 결합해, 자연과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따뜻하고 생기 있게 그립니다. 실제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기억과 감정을 담은 이상적인 공간으로 재구성하며, 자신의 작업을 ‘붓으로 쓰는 수필’이자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 이기훈: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같은 신화적 원형과 종교적 상징을 빌려 동시대 현실을 탐구하는 환상적 리얼리즘을 선보입니다. 강렬한 색채와 오일파스텔의 거친 질감, 기묘한 인물들을 통해 불안하고 종말론적인 세계를 펼치지만, 그 속에는 생명의 존엄과 희미한 희망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20분 정도 NC이스트폴을 둘러보며 11시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 5대 김밥집 중 하나라는 유미분식김밥에서 점심을 먼저 해결했다. 김밥은 꽤 맛있었는데 라면은 별로였다. 김밥을 두 줄 먹을 걸 그랬다.

조은 작가의 그림은 보통 사람의 일상을 담은 풍경화였다. 외국의 풍경을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그려낸 그림들은 누구에게나 예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색감이 너무 좋았다.

얼굴이 그려지지 않은 그림 속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옆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신기했다. 식물로 가득한 그림 속에서 일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평온한 모습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문득 집에 그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일부 작품은 판매 중이며, 이미 판매된 작품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작품은 SEESAW COLLECT에서 구입할 수 있다.)

그림 속에서 유유히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수영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풀코스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수영까지 배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배움은 JTBC 서울마라톤 이후로 기약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와 초코바로 에너지를 충전한 후 이기훈 작가의 전시회 관람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라운드시소 앱을 설치하고 도슨트를 들으며 전시장을 돌았다.

가면을 쓴 어린이들이 노아의 방주를 타고 대홍수를 겪어내는 상상 속 이야기를, 폐벽지에 오일파스텔을 사용해 강렬한 질감으로 그려냈다. 그림 가까이 다가가 눈으로나마 질감을 느껴보려는 시도를 반복했다. 상상력을 자극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전시의 끝부분에 두 작가에 대한 영상이 있어서 좋았다. 그림을 보는 내내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어내는 걸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은 작가의 ‘오늘의 정원’ 전시 도슨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에서 들었다. 그림과 함께 들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흐릿한 그림의 잔상을 떠올리며 작품 설명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화풍과 주제의식이 서로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을 시간 간격을 두고 보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나의 화풍과 주제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 같은 게 있지 않을까? 남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나만의 화풍을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똑같이 한다면 AI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계휴가가 끝났다. 돌봄센터, 학원 빠지기 싫어하는 아이 덕분에(?) 가족여행 없이 혼자서 휴식과 정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미술 전시회 관람이라는 새로운 취미는 관점과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직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내면 근력』을 읽으며 불안에서 벗어나 잠재력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다.

260805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

여름휴가 셋째 날에는 미술관에 다녀왔다. 여름휴가 버킷리스트 중에 ‘미술관 가기’가 있었지만, 평소 미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전무했던 터라 우선순위가 그리 높진 않았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미술관에 대한 영상을 접했다. 만족스러울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휴가 때 아니면 언제 가볼까’ 싶어서 그냥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 전철에서 AI의 도움을 받아 최소한의 예습을 했다. 큐비즘이 무엇이고 누가 주도했으며, 작품을 볼 때 어떤 측면을 보아야 하는지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의도역 5번 출구에서 10시 36분에 63빌딩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는데, 사람이 많아서 11시 30분에 시작하는 도슨트 투어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퐁피두센터 한화에 도착해보니 공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오는 길에 예매한 티켓(2.8만 원)을 취소하고 연간 멤버십(10만 원)에 가입했다. 회사를 오가는 길에 있으니 가끔 반차를 쓰고 들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림 옆에 붙어 있는 QR코드를 통해 AI 도슨트의 작품 설명을 들으며 그림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몰입의 깊이만큼이나 마음은 고요했다. 그 어떤 동요도 느낄 수 없었다.

큐비즘 작가들의 새로운 관점과 시각으로 그린 그림들을 감상하며 인간의 창의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잘 모르지만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들이 있었다. AI 도슨트의 작품 설명이 끝난 후에는 구도·색감·질감이 느껴지는 그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해석하고 즐겼다.

오전 11시 20분쯤 입장하여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관람했다. Gallery 1까지는 모든 작품을 AI 도슨트 설명을 들으며 감상했는데, 핸드폰 배터리도 다 되어가고 배도 고파서 Gallery 2, 3은 빠르게 둘러보고 나와야 했다.

큐비즘 전시회가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와서 Gallery 1에서 좋았던 작품을 다시 보고, Gallery 2, 3의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할 생각이다.

전시장을 나와보니 이미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63빌딩 식당가에서 밥을 먹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여의도로 이동해 멍하니 한강뷰를 보면서 라떼와 빵으로 허기를 달랬다.

마포대교를 바라보면서 JTBC 서울마라톤을 생각했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원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런 자유를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의 경험을 통해 미술관 관람이 나에게 잘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래식 공연처럼 시간을 맞춰서 가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어 자유로웠으며, 미술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만족감도 있었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들이 또 있을 것이다. 일단 경험하고, 판단은 나중에 하자.

260803 국립중앙박물관 (feat. 어메이징 타일랜드)

하계휴가 첫째 날,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신분당선에서 9호선까지는 출근길과 똑같은 경로였다. 4호선으로 갈아타면서부터 비로소 휴가가 실감났다. 4호선 역사 특유의 정취가 좋았고, 전철로 한강을 건너는 기분도 좋았다.

전철 안에서 특별전 〈어메이징 타일랜드〉를 급하게 예습해보려 했지만 집중이 잘 되진 않았다. 그래도 영상에서 전시를 기획한 분의 자긍심이 느껴져 기대를 갖게 됐다.

관람객이 많지 않아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불상의 평온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평온해졌다. 어떻게 하면 저런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마음이 불안할 때 태국의 불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태국의 지리와 역사, 미술을 알아보다가 엉뚱하게도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 존재일까 생각했다. 어떤 바람과 신념이 이토록 화려하고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낸 걸까. 태국이라는 나라를 조금 더 알아보고, 언젠가 직접 가보고 싶어졌다.

상설전시관에는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까지 더해져 사람이 정말 많았다. 어둡고 인적 드문 넓은 전시관에서 차분히 작품을 감상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여기서는 이룰 수 없는 바람이었다.

늦은 점심은 대기 70번째로 이름을 걸어두고 한참 기다린 뒤에야 겨우 먹었다. AR Guide 앱으로 명품 30선을 따라가 볼 생각이었는데 뭔가 원활하지 않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결국 2층으로 올라가 외규장각 의궤실과 사유의 방, 기증관을 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조선·대한제국관을 관람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에 아이와 함께 온다면 전문 가이드와 함께 해야겠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싶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을 많이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낯선 곳에서 혼자 낯선 경험을 하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240402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노 리사이틀

공연 팜플렛의 말끔한 모습과 달리 그는 정장을 입었지만 노숙자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관객들에게 두어 번 인사를 한 그는 의자에 앉아마자 라모의 클라브생 모음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괸객들에게 준비할 틈을 주지 않아서 좀 당황스러웠다.

음향기기로는 재현할 수 없는 천상의 소리를 들으며, 공연장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가 미리 들어본 것이 곡의 전부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부분이 나오면서 잠깐씩 졸고 말았다. 몇 자리 건너에서는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4시에 깬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두번째 곡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 연주는 완벽했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세번째 곡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은 오늘 공연에서 가장 기대했던 곡이다. 그러나 자꾸 미리 들어본 머레이 페라이어의 연주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닐 트리포노프의 연주는 클라이막스에서 강렬함이 좀 부족하달까?

네번째 베토벤 소나타 29번도 기대가 컸는데, 1, 2악장을 들을 땐 미리 들어본 에밀 길렐스의 연주가 떠올랐다. 에밀 길렐스의 강철 타건은 정말 매력적이다. 3, 4악장은 나에겐 어려웠는데 다닐 트리포노프의 연주가 좋았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지난 2월 라파엘 블레하츠의 공연 대비 아쉬움이 컸다. 관객들과 호흡한다기 보다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느낌이랄까? 기량은 지금껏 만나본 연주자 중에서 최고라고 느꼈는데 감동은 그만큼은 아니었다.

사회성 부족한 천재의 느낌을 주었고,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론 이번 공연을 통해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을 알게 되어서 기쁘다. 요즘엔 변주곡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맨델스존의 엄격 변주곡과 지난번 라파엘 블레하츠 공연곡이었던 시마노프스키의 변주곡 나단조를 즐겨 듣는다.

240227 라파우 블레하츠 피아노 리사이틀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얼마만에 클래식 공연장을 찾았는지 모른다.

행복했다. 연주자의 열정이, 피아노 소리가, 그 순간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눈다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언제든 원할 때 이 순간을 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연을 감상했다.

라파우 블레하츠의 연주는 뭐랄까 빠르게 강하게 치는 음 조차도 부드럽고 포근하게 느껴져 듣기에 좋았다.

가장 기대했던 쇼팽 폴로네즈 6번 영웅은 아쉬웠다. 듣는 내내 조성진의 연주가 자꾸 떠올랐다. 쉴틈없이 몰아치는 연주가 흐름을 깼고 미스터치도 있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여서 오히려 쇼팽의 곡들은 연습량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싶다.

달빛이 포함된 드뷔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과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은 각각 조성진, 손열음 연주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마지막 곡은 시마노프스키 변주곡으로, 생소하기도 하고 난해하기도 해서 가장 기대가 없었던 곡이다. 그런데 오늘 공연에서 이 곡이 가장 좋았다. 배경음악으로 음원을 듣는 것과 공연장에서 집중해서 피아노 소리를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음원에선 들리지 않아던 다채로운 소리가 귀에 들어오며 큰 감동을 주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 수차례 있었지만 콧물을 훌쩍이게 될까봐 그때마다 감정을 추스려야했다.

최근에 일 때문에 지쳐서 조금 힘들었는데 큰 위로를 받은 듯 하다. 다시 힘을 내 볼 수 있을 것 같다.

라파우 블레하츠가 다시 내한한다면?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