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팜플렛의 말끔한 모습과 달리 그는 정장을 입었지만 노숙자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관객들에게 두어 번 인사를 한 그는 의자에 앉아마자 라모의 클라브생 모음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괸객들에게 준비할 틈을 주지 않아서 좀 당황스러웠다.
음향기기로는 재현할 수 없는 천상의 소리를 들으며, 공연장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가 미리 들어본 것이 곡의 전부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부분이 나오면서 잠깐씩 졸고 말았다. 몇 자리 건너에서는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4시에 깬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두번째 곡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 연주는 완벽했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세번째 곡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은 오늘 공연에서 가장 기대했던 곡이다. 그러나 자꾸 미리 들어본 머레이 페라이어의 연주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닐 트리포노프의 연주는 클라이막스에서 강렬함이 좀 부족하달까?
네번째 베토벤 소나타 29번도 기대가 컸는데, 1, 2악장을 들을 땐 미리 들어본 에밀 길렐스의 연주가 떠올랐다. 에밀 길렐스의 강철 타건은 정말 매력적이다. 3, 4악장은 나에겐 어려웠는데 다닐 트리포노프의 연주가 좋았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지난 2월 라파엘 블레하츠의 공연 대비 아쉬움이 컸다. 관객들과 호흡한다기 보다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느낌이랄까? 기량은 지금껏 만나본 연주자 중에서 최고라고 느꼈는데 감동은 그만큼은 아니었다.
사회성 부족한 천재의 느낌을 주었고,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론 이번 공연을 통해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을 알게 되어서 기쁘다. 요즘엔 변주곡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맨델스존의 엄격 변주곡과 지난번 라파엘 블레하츠 공연곡이었던 시마노프스키의 변주곡 나단조를 즐겨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