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프로그래밍언어 겨울학교에 다녀왔다.
민망한 이야기지만 총 4개의 Talk중에 단 한개만 들었다 ^^;;
11일 아침 개봉역 근처에서 7시에 철주형을 만났다. 6시에 집을 나서 개봉역까지 가면서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학교 다닐 때는 나도 저들중에 하나였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너무나도 루즈한 대학원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약간 일찍 도착하여 홀로 눈물젖은 빵을 사먹은 후 철주형, 현익형, 유일형과 만나 출발!
차가 많이 막혀 3시간 30분을 소요하여 휘팍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늦어 주간권을 끊어 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였는데, 10시 30분쯤인데 주간권을 파는 사람들이 있어 단 돈 만오천원에 주간권을 구입했다. 철주형 친구분이 가르쳐 주셔서 동영상에서 배웠던 동작들을 하나씩 익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전혀 달랐다. 보드가 내 의도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휙휙돌아가면 속도가 빨라져 무서워 지면 넘어지곤 하였다. 계속 넘어지면서 연습하다가 태인이가 와서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실력이 급속도로 향상해서 펜쥴럼으로 쉽게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4시 20분이였다. 10분만에 내려가야 한번 더 탈 수 있었다. 나는 자만한체로 별 생각없이 속도를 내려오다 엣징을 게을리하고 말았다. 의도와 상관없이 매우 넘어졌고 충격으로 몇 초 동안 일어나기 힘들었다. 자신감 상실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방에 돌아가서도 계속 발이 보드위에 있어 움직이는 상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꼭 넘어졌다…
밤에는 남자들만 있어 술을 마시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3시 넘어 잠들었다. 아침 한환수 교수님의 Talk를 반이상 졸면서 들었다. 몸이 만신창이여서 점심먹고 잠깐 낮잠잔다는 것이 길어져 버려 Talk를 다 포기(?)했다. 저녁을 먹고 현구형 차를 얻어타고 전공에 관한 이야기서 부터 매우 다양한 주제로 현구형과 현익형과 대화를 나누며 대전으로 돌아왔다.
턴 앞에까지 배웠으니 다음에 갈 때는 꼭! 엉덩이 보호대를 구해서 착용하고 보드를 타야겠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방학 … 일상을 즐기자!
25년을 살아오면서 스키장에 가본적이 없다.
물론 작년 여름에 정보과학회로 휘팍에 다녀오긴 했지만 …
대학원에 가면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때가 도래하였다. 다음주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열리는 프로그래밍언어 연구회 겨울학교덕분에 휘닉스파크에서 보드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첫째날과 셋째날은 보드를 타고 둘째날은 학회를 듣기로 했다.
처음배우는 것이라 보드를 탈지 스키를 탈지 고민하다 초보에게는 스키가 배우기 쉽다 하여 스키쪽으로 기울다가 둘다 타본 절대다수가 보드가 재밌다하여 보드를 타기로 결정했다. 보드가 폼나기도 하고!
내가 운동신경이 있는 편인지 없는 편인지 나도 잘 알 수 없어서 빨리 배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겨울에 엠티가서 산오르면 늘 자빠지는건 나였는데, 그런 점에서 약간 불안하긴 하다.
집에 온 지금은 열심히 보드 강좌 동영상을 보고 있다. 잘 못탈 것 같아서 별로 재미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타지 말고 콘도놀이나 할까 한적도 있었는데, 강좌 동영상을 보니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보고 또 보고 상상훈련을 해서 월요일에 도착하면 빠르게 배워 재밌게 타야겠다!
내가 가진 능력은 굉장히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할 때 평범한 내가 대학원 공부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다소 걱정이 있었기에 랩배정 당시 교수님들을 찾아 뵈었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공부를 하는데 선천적인 능력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나요?”
지금의 지도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리의 좋고 나쁜 것 보다 동기부여와 집중력이 중요한데, 합격한 석사학생들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집중력이 5%안에 드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지만 내심 나의 집중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집중력이 안좋았던 나는 공부할 때를 회상해보면 지루함을 참아내며 자주 쉬고 다시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심지어 요즘에는 뭔가 자료를 찾아보려고 웹브라우져를 켜놓고는 다른 뉴스에 빠져 그 것을 읽은 후에, ‘내가 왜 웹브라우져를 켰지?’ 하는 바보같은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빈번해 질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하여 특단의 조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집중력에 관한 작은 책을 한권 구입했다.
아직 10분지 1도 안읽었는데, 집중을 하기 위해서는 릴렉스가 필요하다고 하고 릴렉스를 위해서 바른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편안히 복식호흡을 하라고 한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으려고 해도 잘 안되었는데 책에 써 있는 방법이 인상적이였고 실제로 그렇게 하니까 바른자세가 유지되는 것 같다.
방법은 머리에 끈이 달려 있어서 천장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허리가 펴지는 듯! 책을 조금 밖에 안읽었지만 뒷부분에 보면 집중력을 끌어오기 위해서 동기부여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 듯 하니 앞으로 교수님의 말씀은 새겨 들어야 하겠다.
지난주 금요일 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가 차를 타고 이동한 거리의 합이다.
그 중에 내가 운전했던 거리는 550km …
금요일에 서울에 도착! 어머니가 여행을 떠나신 관계로 김밥 2줄을 사들고 집에 들어가 컵라면과 함께 먹으며 신문을 보면서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오락하고 TV보고 라면먹으며 신선놀음(?) 하다가 밤 8시에 순일이와 광현이와 보현형을 만나 엠티 장소인 덕현리로 출발! 2시간 운전 끝에 오즈 엠티 장소에 도착했다.
평소와 다르게 연락망이 풀가동되어 많은 선배님들이 오셨다. 곧 20주년을 맞이하는 숭실대 컴퓨터학부에서 역사를 자랑하는 모임이다 보니 재학생보다 졸업생 숫자가 더 많았다. 이번에는 내가 정회원 된 이후로 가장 많은 시니어 선배님들이 참석해주셨다. 나도 이제는 시니어긴 하지만 ^^;;
술기운 때문인지 부끄러웠는지는 몰라도 자기소개 할 때 말이 자꾸 꼬여서 낭패를 보았지만, 많은 선후배들이 모여서 오즈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참 좋았다. 앞으로도 꾸준히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3시쯤 잠들려고 노력했으나 방바닥이 너무 뜨겁고 시끄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다 결국 6시에 집을 향해 출발했다. 7시 30분에 도착하여 골아 떨어졌고 11시에 일어났다. 감기 몸살로 컨디션이 안좋으신 아버지가 창원으로 이사하시는 것을 도와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먼저 사원아파트로 이사하시고 집은 4월달에 이사한다고 한다.
11시 부터 짐을 싸고 1시에 집을 출발했다. 서울집에서 창원까지의 거리는 대략 410km 정도였고, 밥먹는 시간까지 합쳐 대략 5시간의 긴 거리를 운전하였다. 엠티 갔다온 후라 졸리고 피곤하긴 했지만, NF 소나타를 타고 140km/h로 미끄러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대진고속도로를 거쳐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마산으로 들어가 창원으로 넘어가면서 마치 몇년만에 고향에 온 것 처럼 기분이 들뜨고 좋았다. 예전보다 다소 복잡해지긴 했지만 엊그제 살던 곳 처럼 익숙했다. 이사를 완료하고 죽마고우인 원준군과 잠깐의 만남을 가지고 사원아파트에서 잠을 청하고 아침에 대전으로 올라왔다. 경남에서는 눈을 보기 힘든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어 대전에 못오는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평소보다 느리게 와서 3시간 30분이나 걸려 대전에 도착 …
예상에 없던 매우 긴 외출이였다.
잠깐이라서 창원을 제대로 못 둘러본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곧 4월이 다가오겠지 …
내가 볼링을 처음 접한 것은 경상남도 창원에 살 때, 정확히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만 살다가 먼 타지로 이사가서 정붙일 곳이 없었던 어머니께서 취미 생활로 볼링을 시작하신 것이 계기가 되어 아버지를 거쳐 나까지 볼링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어머니는 언젠가 볼링 대회에서 구사하신 멋진 폼으로 마산 MBC 저널의 표지모델로 발탁되신 적도 있다.
대충 자세를 배우고 처음 볼링을 쳤을 때, 나는 어떻게 공이 끝까지 꼬랑(?)에 안빠지고 굴러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100점을 넘기까지 상당히 오래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볼링에 영 소질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100점을 무난히 넘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부터 볼링이 너무 재밌었다. 방학이 되면 월 5만원을 내고 볼링장에 가서 지칠 때 까지 미친듯이 쳤다. 보통 하루에 12~15게임 정도 쳤던 것 같다. 수십만번(?)의 스텝을 밟았기에 자동차의 운전을 평생 잊어버리지 않듯 나는 볼링을 그렇게 내안에 받아 들이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온 후 몇 달만에 혹은 일년만에 볼링을 쳐도 전혀 어색하지가 았았으니까 …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마음먹고 집중하면 200점을 칠 수 있을꺼라고 자신하던 때, 경상남도 도청배 청소년 볼링대회에 출전하였다. 유니폼도 없이 라운드 티에 청바지를 입고 등장한 나는 심판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다른 학생들은 다 학교 볼링부 소속 준 선수들이였다. 소심한 나는 안그래도 심판의 꾸지람으로 인해 주눅이 들었었는데, 다른 애들은 다 선수이고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볼링을 쳐서 기가 많이 죽어있었다.
재밌었던 건 정식 대회라서 파일라인을 밟으면 ‘삐’ 소리가 나며 0점 처리되었고, 평소에 나는 파울라인을 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연습투구에서 당당하게 ‘삐’ 소리를 내버렸다. 그 후로 약간 신경써서 실전에서는 파울을 하지 않았지만 나랑 같은 레인에서 쳤던 부산상고 누나(?)는 간간히 ‘삐’ 소리를 울려 웃음을 참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3게임 평균으로 순위를 가르는 게임이였는데, 나는 먼 타지였던 김해에 친구와 둘이 가서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문제는 레인 상태가 거시기 하여 나의 훅이 전혀 먹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사용하는 스파트로 첫게임을 치다가 망쳐버렸다. 변화가 필요했다. 나는 훅이 먹지 않는 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직구와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대각선으로 레인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겨우 평균 150점으로 경기를 마쳤고, 어이없게도 그 점수가 남자 중등부 1위였다. 그렇게 나는 홀로 청바지를 입고 고독한 승부를 결정지었다. 한동안 볼링선수로 나가볼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당시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더라면 어떻게 됬을지 모르겠으나, 그랬더라면 지금쯤 어느 작은 볼링장에서 코치를 하며 아줌마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용호 볼링장으로 옮겼다. 여름 방학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강좌를 들었고 그 때 강사가 그당시 프로볼러 랭킹 1위였고 퍼팩트를 30회 이상 기록한 배대권 프로였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1주일 동안 폼연습만 다시했다. 2주를 그렇게 기본기를 철저히 다시 배우고 전열을 가다듬은 나는 그 방학에 지금도 깨지 못하고 있는 최고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날은 한마디로 신들린 날이였다. 첫게임은 190점대를 기록했고 둘째게임에 사고를 치게되었다. 터키로 시작하여 4프레임 스페어, 5프레임 스트라이크, 6프레임에 스페어, 그 이후로 스트라이크 아웃! 점수는 259점이였다. 그 다음게임도 230점을 넘었고 그 날은 총 10게임을 쳤는데 5게임에서 200점을 넘었다. 내평생 259점을 넘어볼 수 있을까?
카이스트에 와서 생각지도 못하게 볼링클럽이 만들어졌고, 일주일에 한번씩 꾸준히 볼링을 즐기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너무 점수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본기를 다져서 볼링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배부른 욕심이 있다면 나도 마이볼을 가지고 싶다. 어머니와 손크기가 비슷하다고 하여 늘 어머니 공을 물려받았는데, 지금 쓰고 있는 공도 회전력이 좋지 않다고 하여 버려진 것을 내가 업어온 것이다. 정말 내 손에 맞는 꽤나 괜찮은 공을 하나 가지고 싶다. 공이 손에 정확히 맞으면, 회전력이 2배는 상승할 것 같다. 올해 하나 질러버릴까!
크게 힘이 들지도 않고 사람들과의 친목에도 좋은 볼링 …
볼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마누라를 만난다면 아마도 평생 즐기는 레포츠가 될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