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

LG전자에는 PL로 불리는 역할이 존재한다.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평가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쓸 수 있는 권한도 없는 애매한 위치다. 그래서 블라인드에선 비공식 조직책임자로 불리기도 한다.

2016년 말 너무 빨리 PL이 되어 버렸다. 기존 PL의 팀장 진급으로 바뀐 리더십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갑작스럽게 리더가 되는 길을 택했고 그렇게 2022년까지 중간에 육아휴직 1년을 제외하고 5년 동안 PL 역할을 수행했다.

대체로 즐겁게 PL 역할을 수행하면서 보람도 많이 느꼈다. 자율성 기반의 조직문화를 추구했고, 구성원들이 성장하고 회사생활에 만족하는 것이 느껴질때마다 행복했다.

그러나 육아휴직에서 복직 후 내가 좋아하고 잘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 후에는, 그 때 PL을 맡지 않았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PL로서 잘 하기 위해서 투입했던 리소스를 좋은 SWE가 되는 데 투입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PL을 Part Leader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Project Leader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Part Leader라고 생각한다.

Part Leader는 조직문화를 관리하고, 구성원들의 성장과 회사생활 전반에 대해서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반대로 말하면 일 외적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Part의 규모가 13명에 이르렀을 때 나는 관리자의 역할에만 충실해야 했다.

Project Leader는 하나의 프로젝트의 성공에 집중할 수 있다. 선택에 따라선 Tech Leader로서 실무를 겸임하는 것도 가능하다.

올해 초 새로운 팀이 꾸려지면서 Project Leader가 되었다. Part Leader로서의 의무를 덜어내고 Project 하나의 성공에 몰입할 수 있게 되어서, 기술적으로도 직접 기여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새로운 팀장님의 리더십도 좋고, 조직 문화도 좋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좋다. 나만 잘 하면 된다.

금주

다시 금주를 실천한지 2~3주 정도 된 것 같다.

40대, 맞벌이, 육아라는 조건 속에서 하루에 10분이라도 자기계발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정말 중요하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의지로 이겨내야 하는데, 40년 살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인간의 의지력은 형편없다는 것이다.

성장을 위한 노력에 의지력을 좀 덜 써도 되도록, 술 끊는 의지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나에겐 술을 끊을 때 의지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순간은 좋아 하지만, 취하는 것이 싫고 피곤한 것이 싫다.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는 가능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 삶을 이어나갈 생각이다.

2022년

2022년엔 도전했고 실패했다.

지나고 나서 보면 별거 아닌데, 중간에 심리적으로 힘들어서 출근 길에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노래를 듣다가 위로 받는 느낌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보이지도 않는 끝 지친 어깨 떨구고
한숨짓는 그대 두려워 말아요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걸어가다 보면 걸어가다 보면 걸어가다 보면

아이도 안다. 내가 도전했고, 실패했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또 도전할 것이라는 것을.

2022년엔 “니 마음 대로 해라” 류의 책을 많이 읽었다.

  •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 익숙한 것과의 결별
  • 마음이 흐르는대로
  • 마음 가는 대로 해라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마음 가는 대로 살기로 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걸로. 기왕이면 그걸 잘 하는 걸로.

조직 책임자가 될 기회를 날려버림으로써 그 의지를 세상에 알렸다.

2022년은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 마흔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해로.

팀장의 탄생

연말 조직개편에서 여러명의 팀장이 탄생했다. 그 중에 나는 없었다.

올해 말에 팀장 제의가 올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답변을 준비했다.

키워드는 “피자 두 판”.

리딩을 하더라도 피자 두 판으로 다 먹을 수 있는 규모까지만 커버하겠다는 것이다.

6~7명 정도가 될텐데, 그 정도가 코드 레벨에서 구성원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했다.

2019년 파트 규모가 13명이 되었을 때 나는 매니저 역할에만 충실해야 했다.

2007년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 내 커리어에 나는 없었다.

나의 주요 목표는 주어진 역할, 주어진 미션에 충실함으로써 조직에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랜기간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얻은 것들이 적지 않지만, 경력 15년 차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으로 승부를 보자고 결심한 다음에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15년 전에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라는 책을 읽었더라면 나의 커리어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최근엔 후배들에게 이 책을 권유하며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공유한다.

“1인 기업을 운영하고 있고, 1년 단위로 지금 다는 회사와 계약을 한다고 상상해보자. 계약 조건이 안맞으면 조건이 더 좋은곳으로 가자. 대신 계약을 맺었다면 최선을 다하자. 개인회사의 브랜딩과 성장을 위해서.”

팀장이 아닌 “시니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내년에는 흥미진진한 미션이 기다리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덕업일치”의 한 해를 보내게 될 것 같다.

그와 동시에 매력적인 개인회사가 되기 위한 노력도 지속할 생각이다.

리트코드 프리미엄 구독을 연장해야 할 것 같다. 영어도 꾸준히 공부할 방법을 찾아봐야할 것 같다.

수학적 용기

대학원 시절의 나에게 “수학적 용기”가 있었다면, 삶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두 번째로 나자빠지는 노력만 하는 사람이 나였으니까. 담담하게 꿋꿋하게 하지 못하고 금방 포기했으니까.

과학자나 엔지니어로는 탑티어에 이를 수 없다고 판단해서,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기술적 역량 위에 인문학적 역량과 인간적인 매력을 잘 버무려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수학적 용기”를 가지고 해보려고 한다.